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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평생 유명해지고 싶었다

기획전 < MELVILLE x MANN x REFN > 장 피에르 멜빌, 마이클 만, 니콜라스 윈딩 레픈

그리고 나는 평생 유명해지고 싶었다
기획전 < MELVILLE x MANN x REFN >
장 피에르 멜빌, 마이클 만, 니콜라스 윈딩 레픈

글: GKD(에세이스트) 

윌리엄 프리드킨과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Sorcerer (1977) 대담 영상 중 한 장면

* 윌리엄 프리드킨과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Sorcerer (1977) 대담 영상 중 한 장면

“이제 저는 젊은 버전의 프리드킨, 당신이므로...”

 
프리드킨의 면전에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영화감독이 몇이나 될까? 니콜라스 윈딩 레픈은 그런 사람이다. 거의 기가 막힐 정도의 오만과 자신감으로 중무장한 채, 그는 대담 초반부터 프리드킨의 아픈 손가락인 <소서러>를 거의 취조하듯 파고든다. 그때는 <온리 갓 포기브스>를 발표한 직후였고, 그는 자기 작품이 걸작이라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언한다. 프리드킨은 어떻게 응수할까. “여기 의사 있나요? 구급대원이 필요해요.” 그러나 레픈은 개의치 않는다. 그는 자신의 출세작 <드라이브>마저 걸작이라고 밀어붙인다. 프리드킨이 <드라이브>가 걸작이 되려면 적어도 30년은 더 지나야 한다고 받아치자, 레픈은 이렇게 답한다. “30초면 됩니다.” 이 정도로 경쟁적인 영화감독이 또 있을까? 아마 알베르 세라 정도만이 그와 비견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갖고 있을 것이다.
 
기획전 '멜빌X만X레픈' 포스터 3종

* 기획전 '멜빌X만X레픈' 포스터 3종

나는 레픈의 말들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의 저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위대함에 대한 일종의 페티시즘을 느끼게 된다. 그는 위대함을 하나의 미덕으로 사유하는 사람이기보다, 위대함이라는 추상적 가치 자체에 욕망을 느끼는 인간이다. 이번에 마련된 한국영상자료원의 < MELVILLE x MANN x REFN > 전을 보면서, 나는 이 흥미로운 라인업을 레픈의 입장에서 다시 배열해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재구성하면 거기에는 하나의 계보가 드러난다. 영화사의 계보라기보다 페티시즘의 계보다. 그리고 그 계보는 결국 캐릭터로서의 영화감독, 현실을 가공하고 재구성하면서 마침내 자기 자신까지 하나의 이미지로 바꾸어버리는 남성 영화감독이라는 존재의 진실과 맞닿아 있다.

오슨 웰스 <위대한 앰버슨 가> 장면

* 오슨 웰스 <위대한 앰버슨 가> 스틸 이미지
ㅡ 편집자 코멘트: 흩날리는 눈발이 ‘목화밭’이라는 기억으로 변형된 건 아닐까.


멜빌에 관한 전설적인 일화가 하나 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알베르 세라의 인터뷰에서 접했는데, 오슨 웰스의 <위대한 앰버슨 가>를 두고 나눈 대화에 관한 것이다. 세라에 따르면 멜빌은 그 영화의 아름다운 장면 하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배우들이 목화밭에서 춤을 추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친구는 그런 장면이 영화에 없다고 말했고, 실제로도 그 장면은 존재하지 않았다. 멜빌이 본 것은 그저 실내 살롱에서 벌어지는 장면뿐이었는데, 그는 그것을 전혀 다른 식으로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라의 회고를 조금 더 정확히 풀어 말하자면, 멜빌은 이후 <무서운 아이들>에서 바로 그 존재하지 않는 장면, 다시 말해 상상 속에서만 본 목화나무 장면를 오마주한다. 외부에서 환기된 이미지와 무의식적인 기억은 그렇게 영화를 조작한다. 즉, 멜빌에게 영화는 기억으로 아름다움의 대상을 환기시키는 계기이자 페티시였다. 영화는 아름다움일 뿐 아니라 아름다움을 욕망하게 하는 페티시다.


 

멜빌, 만, 레픈…페티시즘의 계보로 이어진 감독들


장 피에르 멜빌은 위대한 미국 소설가 ‘허먼 멜빌’의 이름을 따 자신의 ‘감독명’을 만들어낸 인물이다. 그 이름은 그의 본명을 압도했고, 결과적으로 커리어와 실제 삶을 분리하는 하나의 장치가 되었다. 여기서부터 나는 멜빌이야말로 확실한 페티시스트, 다시 말해 미국을 환기하는 모든 이미지를 페티시로 환원하는 영화감독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이를테면 <도박사 밥>은 놀라울 정도로 미국적인 영화다. 밥이라는 인물은 단지 미국식 갱스터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거의 미국적 갱스터의 삶 자체를 수행하는 인물이다. 범죄자라는 라이프스타일은 그에게 하나의 직업이나 범죄 행위의 집합이 아니라 양식이 된다. 우리가 서부극이나 갱스터 영화에서 보는 것도 결국 한 명의 범죄자가 아니다. 그것은 꿈-추적자로서의 인간, 혹은 기회주의적 개입을 통해 부를 축적하려는 벼락부자의 욕망에 더 가깝다. 파멸이 늘 그를 기다리고 있지만, 그는 동시에 아직 오지 않은 어떤 기회를 향해 몸을 건다.

도박사 밥

ⓒ <도박사 밥> (1956)

멜빌의 영화는 느와르 안에 기묘하게 뒤얽혀 있는 실존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을 정확히 간파한다. 실존주의는 범죄자에게 은밀한 운명의 기운을 부여한다. 그는 곧 죽을 것이다. 사라질 것이고, 실패할 것이다. 반면 자본주의는 그에게 세속적 영광의 가능성을 부여한다. 그중에서도 명성은 인간이 참여할 수 있는 가장 헛된 게임에 가깝다. 그러나 <도박사 밥>의 밥은 조무래기 젊은이들이 우러러보는 스타이기도 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감각이 다시 떠오른다. 앞서 말한 ‘위대함’에 대한 페티시 말이다. 레픈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기억으로 남을 이미지를 만들고자 했다. 어쩌면 그의 진짜 한계도 여기서 비롯되는지 모른다. 그는 서사나 운동보다 먼저 페티시를 만든다.

그가 만든 영화들은 무수한 비판을 받아왔다. 바로 이 점이 레픈을 만이나 멜빌과 갈라놓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를 가장 뼈아프게 찌른 평가는 영화평론가 닉 핀커톤이 <네온 데몬>에 대해 쓴 평론일 것이다.

ⓒ The Neon Demon (2016)

ⓒ <네온 데몬> (2016)
 
“그의 특징은 ‘숏’에 대한 집착이다. 개별 장면은 완벽하지만, 장면과 장면 사이의 연결은 간과된다. 그는 마치 ‘모든 장면을 액자로 걸 수 있다’는 목표로 영화를 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영화라기보다 LP 앨범 커버나 착취영화 포스터 디자인에 더 적합한 감각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이상하게도 좀처럼 반론되지 않는다. 어떤 비판을 던져도 “그게 바로 의도다”라는 답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아마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폴 슈레이더가 오래전 <이지 라이더> 리뷰를 마치며 말했듯, 이제 우리는 이런 게임을 하기엔 너무 늙지 않았나? ”
 
<네온 데몬> 이후에도 레픈은 여전히 이런 게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는 레픈이 다른 영화감독들이 표방하는 단 한 편의 영화보다, 캐릭터로서의 영화감독이라는 형상에 더 집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영화는 결국 이 한 문장으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나는 평생 유명해지고 싶었다.”



bronson
ⓒ <장기수 브론슨의 고백> (2008)

그의 작품 <장기수 브론슨의 고백>은 “내 이름은 찰스 브론슨, 그리고 나는 평생 유명해지고 싶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영화는 레픈의 커리어에서 가장 개인적인 작품이다. 한 남자가 ‘유명한 죄수’로 변신하는 이 이야기에 대해 레픈은 한 인터뷰에서 회고한다. “아마 그게 24살 때의 내 모습이었기 때문일 거다. 나도 유명해지고 싶었다.” 그는 자신을 브론슨이라는 죄수에 투영했다고 고백한다. 예술가라는 존재를 범죄자로 비교하는 경우(토마스 드 퀸시의 『 예술 분과로서 살인 』 같은)는 많지만, 레픈의 목표는 예술적 열정과 비이성적 욕망의 조합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 발현으로서 라이프스타일에 맞춰져 있다. 그는 찰리 브론슨을 살인자나 갱스터라는 이유로 영화화한 것이 아니라, 예술가에 대한 알레고리로서 바라봤기 때문에, 영화적 대상으로 바라본 것이다. (“그는 그보다 조금 더 매혹적인 존재다.”)

장피에르멜빌

비록 만이나 프리드킨 같은 위대한 영화감독은 ‘전문가’에 더 가깝다. 멜빌은 물론 레픈이 지향하는 유명인으로서의 영화감독이라는 면모와, 만이나 혹스가 지향하는 전문가로서의 영화감독이라는 면모를 동시에 가진 인물이다. 그는 인터뷰 같은 데 자주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스스로를 하나의 캐릭터로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끝내 포기하지는 않았다. 선글라스, 중절모, 코트.

만은 멜빌의 진정한 후계자 중 한 명이다. 그는 과묵하고, 자신의 재능을 과시하지 않는다. 그 재능은 만의 영화 속에서 온전히 드러난다. <히트> 같은 작품은 전문가주의의 내면적 고독을 주제로 삼고 있다. 그것은 멜빌의 후기작들, 이를테면 <사무라이>나 <그림자 군단>이 품고 있는 고독과도 연결된다. 일본에서 기자로 활동하는 외국인의 이야기를 다룬 <도쿄 바이스> 같은 시리즈에서도 그 고립감은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주인공인 외국인 기자는 일본 사회 안에서도, 그가 취재하는 범죄자들의 사회 안에서도 미묘한 경계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것이 멜빌 영화에서 ‘집단’ 혹은 ‘군중’과 ‘개인’이 맺는 관계일 것이다. 이들의 영화에서 한 명의 개인은 실존주의적 영웅이면서 동시에 조명을 받는 스타이고, 따라서 즉각적인 관심을 요구하는 하나의 페티시가 된다.

도쿄 바이스
ⓒ <도쿄 바이스> (2022-2024)

영화 자체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레픈은 어쩌면 오도된 작가주의의 결과물인지도 모른다. 그는 작가로서의 오만함을 심각한 수준까지 밀어붙였고, 그 뻔뻔함은 마침내 자신의 이름, 곧 NWR을 하나의 브랜드로 활용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과장된 제스처의 이면에 있는 페티시즘과 숭배의 구조야말로 그의 영화를 흥미롭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투 올드 투 다이 영>의 거만할 정도로 뻔뻔한 즉물성은, 레픈의 작업 가운데서도 가장 실험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묵상적인 방식으로 페티시를 사고하게 만든다. <투 올드 투 다이 영>의 5화는 시리즈 전체의 스토리라인에서 다소 비껴나 있으면서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레픈의 페티시즘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준다. 주인공 마틴은 일반인을 유인해 포르노를 제작하는 업자들을 찾아간다. 그는 실연을 당했고 슬픔에 잠겨 여기까지 왔다고 말하며, 포르노 제작업자는 그런 그를 다시 유인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하나의 살해극이다. 하지만 사실 여기서 이야기는 거의 중요하지 않다. 흔히 영화적 미덕으로 치켜세워지는 숏과 숏의 연결이나 운동감조차 이 에피소드에서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이미지가 지닌 즉물적인 힘이다.

이를테면 이 에피소드, 한 편의 중편영화라고 해도 무방한 이 작품에는 케네스 앵거와 파스빈더, 윌리엄 프리드킨에게서 빌려온 ‘호모섹슈얼한’ 이미지들이 가득하다. 앵거의 <스콜피온 라이징>에서부터 프리드킨의 <크루징>, 파스빈더의 <폭스와 그 친구들>에 이르기까지, 동성애자 커뮤니티에서 끌어온 장식적이고 페티시적인 이미지들, 그리고 신체에 대한 집요한 관심은 이야기 전체를 거의 집어삼킨다. 느릿느릿하고 명상적이며 초월적인 시간성 역시 결국은 이 즉물적인 감각을 위해 동원된다.

<투올드투다이영>
ⓒ <투 올드 투 다이 영> (2019)

관객을 페티시 안에 가두어두는 레픈의 전략은 여기서 가장 성공적으로 작동한다. <투 올드 투 다이 영>이 겨냥하는 즉물적 감각은 미국이라는 ‘재현된 유토피아’에 들러붙은 모든 꿈들을 다시 재현한다. 그때 레픈이 바라는 것은 만이나 멜빌이 감행했던 페티시를 한층 더 밀어붙여 ‘초월적 형식’으로 격상시키는 것이다.<피어 X>와 <드라이브>에서 그는 이미 그런 종류의 페티시즘을 시도한 바 있다. 자동차와 호텔이 바로 그런 대상이었다. 그러나 <투 올드 투 다이 영>에서 그것은 더 노골적이고도 더 효과적이다. 마틴이 탄 차가 달리는 곳은 사막이다. 장 보드리야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든 시선이 투명해지고 무화되는 숭고한 이미지로서의 사막.

레픈은 페티시스트라는 꼬리표에 개의치 않는 척해 왔다(물론 그것은 절반만 진실일 것이다. 모든 창작자는 결국 평에 신경을 쓴다). 그의 페티시즘은 그를 평생 유명하게 만들었고, 동시에 그의 미학적 전략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다. “어디에 니콜라스 윈딩 레픈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는가?” 하지만 레픈은 아마도 자신이 이미 위대한 걸작을 만들었다고 뻔뻔하게 답할 것이다. 그의 위대함에 대한 집착, 이름에 대한 집착, 바로 그것이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미적 프로그램을 이룬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반복하자면, 그는 평생 유명해지고 싶어 영화를 만든 사람이다. 나는 때로 이 위악 안의 솔직함이 답이 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