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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끊임없이 현재화하는 곳

모은영 한국영상자료원 신임 원장

"과거를 끊임없이 현재화하는 곳"
모은영 한국영상자료원 신임 원장 

글: 김소미(씨네21)
사진: 최성열(씨네21)



화면 안의 세계를 만드는 것은 감독의 몫이지만, 화면과 관객 사이의 거리를 설계하는 것은 프로그래머의 몫이다. 모은영 신임 원장은 그 거리를 약 20년 동안 조율해온 사람이다. 2008년, 한국영상자료원이 상암동 신청사에 시네마테크 KOFA를 열었을 때 그는 시네마테크부 팀장으로서 텅 빈 상영관에 관객을 불러들여야 하는 최전선에 있었다. 관객이 아직 한국영상자료원을 낯설게 여길 시절. “이렇게 먼 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를 인사말로 되뇌이던 그는 구로사와 아키라 탄생 100주년 특별전으로 1만5천여 관객을 끌어모으고, 1930년대 무성영화 변사 공연의 문법을 되살려 지금은 자료원의 고유한 개성이 된 프로그램들을 일궈냈다. 라브 디아즈 전작을 1년에 걸쳐 상영하는 장기 기획과  유실된 <만추>(이만희, 1966)의 녹음 대본을 입수해 재해석한 낭독 공연 역시 공적 기금의 토대 위에 선명한 기획이 작동한 결과였다.

이후 그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 장르영화의 한가운데를 걸었고, 2025년에는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서 한국 독립영화의 생존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장르의 쾌락과 독립영화의 진정성, 시네마테크의 고전과 영화제 현장의 동시대성이 그리는 궤적은 넓은 호를 그리되 흩어지지 않는다. 구심점에 서서 ‘지금 이 영화를 왜 이 관객에게 보여주어야 하는가’ 물었던 모은영의 질문은 이제 ‘이 시점에서 한국영상자료원만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로 연결된다.

2026년 3월, 모은영 신임 원장이 자리한 한국영상자료원의 문을 두드렸다. 취임 보름여 만에 찾은 그의 집무실엔 아직 전임자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집기도 단출했다. 이유를 물으니 벌써 “다음에 오는 사람이 너무 힘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인삿말처럼 주고받은 그 첫마디가 든든한 귀환을 알리는 듯했다.

모은영 원장

2017년 이후 다시 시작된 상암동 출근에 소회가 남다르겠습니다.
앞으로 할 일이 정말 많겠구나 실감하고 있습니다. 전임 원장님께서 많은 이들에게 존경 받으며 이뤄 놓으신 것들을 잘 이어받아서, 제시간에 해야만 하는 일들에 최선을 다해야겠지요. 그것이 이 자리에 올 다음 분들을 위한 초석이 되기를 바라고요. 그런 마음가짐으로 왔습니다.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직이 1년만에 공석이 되었는데 주위 반응은 어떠한가요.
고맙게도 제가 가서 영화계를 위해 반드시 할 일이 있을 것이라고 독려해주죠. (웃음) 한국영상자료원에 거는 기대가 크다는 걸 느낍니다. 올해 서울독립영화제는 이사회가 회의를 거쳐 향방을 논의하고 있는 상태인데 일단은 기존 사무국이 업무를 잘 이어가리라 생각합니다.

큐레이터, 프로그래머, 그리고 영화제 집행부를 아우르는 오랜 경력의 소유자입니다. 이 경험들이 원장직에 어떤 토대가 되어줄까요.
독립영화와 고전영화는 제가 처음 영화 일을 시작할 때부터 품어온 두 가지 축이었는데 여기에 장르영화를 폭넓게 접한 시간이 더해진 셈입니다. 그러다 작년에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이라는 자리에서 조금 떨어져 전체를 조망하는 경험을 했죠. 경영의 감각을 이곳에 와서도 잘 풀어내보자는 생각인데요. 프로그래머, 큐레이터 등 전문가들이 자율성을 갖고 실력을 발휘하실 수 있도록 돕는 게 제 역할이라고 봅니다.



 

공공성과 아카이브의 방향을 묻다 


지난해 새 정부, 올해 새 원장 체제를 맞이한 한국영상자료원. 개괄하자면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까요.
한국영상자료원의 위상, 조직 규모는 약 10년 전에 제가 있을 때에 비해 훨씬 커졌습니다. 외부 평가도 좋구요. 그런 것들을 잘 이어나가면서 이 기관의 근원적인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되새기려고 합니다. 우선 보존 기관이지요. 역사를 기록해서 현재화하고 미래에 전달한다는 가장 근본적인 것들에 대해 돌아보고 싶어요. 또한 이곳은 공공기관입니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곳이 국민들에게 “우리 것이다”라는 자긍심을 줄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해요. 지자체가 운영하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일하면서 특히나 느꼈습니다. 기관이든 영화제든 사람들이 먼저 자랑스럽게 찾는 곳이 되어야 선순환이 이뤄집니다. 요컨대 공공성이라는 측면에 좀 더 방점을 찍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조직도

* 한국영상자료원 조직도

과거에도 오랜 기간 몸담고 계셨기에 드리는 질문인데요. 업무 방식이나 조직 구성 면에서 변화가 필요한 지점이 있다고 보세요?
아직 파악하는 단계이긴 한데 일의 가짓수와 프로젝트 규모가 매우 커진 반면 조직 체계 자체는 과거의 작은 조직 형태에서 크게 변하지 않은 측면이 있습니다. 한 분 한 분에게 집중되는 업무량이 많은 것도 사실이고 각자의 전문 영역과 사무·행정 업무 사이의 균형 조정도 필요해 보입니다. 한국영상자료원은 매우 특수하고 전문적인 업무를 다루는 기관인데 그 전문성이라는 것이 프로그래밍이나 복원 같은 분야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 직무에 계신 분들이 자긍심을 갖고 일할 수 있는 조직 문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업무를 막 시작한만큼 팀별로 여러 직원들을 만나 이야기를 청취하고 있어요.

국립 아카이브로서의 정체성과 시네마테크 및 대민 시설, 부지 마련 중인 국립영상박물관 등 임기 내 특히 역점을 두고자 하시는 분야가 있습니까.
아무래도 지금 가장 큰 현안은 국립영상박물관 건립이죠. 작년에 부지 선정 예산을 확보해놓은 상태이고 이 부분을 잘 준비해 나가야 합니다. 기존 박물관의 확장이나 이전이 아닙니다.  K-콘텐츠, 대중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복합관의 방향으로 추진 중입니다. 더불어 제가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아카이브 기관으로서의 본연의 역할입니다. 힘의 안배가 필요한데요. 디지털 전환의 중요성이 대두되다보니 한편으론 필름이 계속 소실되는 형편이에요. 한국에서 아날로그 필름을 보존하고 유지하고 전달하는 유일한 기관인데 보존고 관리, 필름 복원 예산은 지속적으로 조금씩 삭감되고 있으니까요, 그 중요성을 다시 강조해야 합니다. 

(왼쪽부터)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모은영 신임 한국영상자료원장

*(왼쪽부터)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모은영 한국영상자료원장

문화체육관광부 축사에서 “한국영상자료원이 K-콘텐츠의 대표 거점이 되기를 바란다”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아카이브 본연의 역할과 화려한 ‘K-콘텐츠 육성’ 사이에는 필연적인 괴리가 있는데요. 이 기대를 어떻게 보시나요?
전 한국 영화사 혹은 대중문화사에서 이미 그 선례를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한국 영화가 처음 태동할 때도 악극단과 같은 공연계 배우와 제작자 간 인적 교류가 활발하게 일어나면서 영화로의 전환이 이루어졌어요. 영화사 초기에 이미 그런 경험들이 있습니다. 지금 각광받는 한국 대중문화, K-콘텐츠의 전성기 이면에는 한국영화가 오랜 시간 우리의 생활 양상과 트렌드 등을 자연스럽게 전달한 영향이 있다고 봐요. 다양한 매체의 결합과 이를 통한 축적이 비로소 외부에서 느끼는 매력을 만드는 것이고요. 이는 현재 대중문화 복합관으로 방향이 잡힌 국립영상박물관 준비와도 연계되는 문제인데 지금의 K-콘텐츠를 일군 근간이 무엇인지 그 아카이빙이 매우 부족한 상황임을 절감합니다. 한국영상자료원이 그동안 쌓아온 노하우로 이 부분을 수집, 정리할 계획입니다. 대중문화의 중심에 영화가 있다는 방향을 제대로 설정하는 거죠. 그리고 시네마테크 재직 시절에 1930년대 변사 공연 문화를 연구해보니, 영화 상영 때 노래를 하는 등 다양한 연희 방식이 자연스럽게 결합돼 있었거든요. 대중문화 복합과 역시 다양한 분야의 K-아티스트들이 결합하는 융합 기획을 통해서 박제된 박물관이 아니라 관광객도 가장 먼저 찾는 랜드마크처럼 자리 잡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분산, 연결, 그리고 맥락—영상자료원의 다음 단계 



3월 중 대통령이 2차 공공기관 이전을 강조하고 한 도시 집중 배치 계획도 언급한 상황입니다. 구체적인 이전 논의가 나오는 중인지요.
정부의 지역 분산 및 발전이라는 기조에는 당연히 동의합니다. 다만 영상자료원이라는 기관은 조금 다른 관점에서 바라봄직 합니다. 한국영상자료원은 향유 기관이기도 하잖아요. 수도가 아니라 지방에 가더라도 한 곳에만 있으면 그 자체가 불균형이 되는 겁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한국영상자료원과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곳은 전역에 고르게 퍼져 있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분원의 형태든 미니 시네마테크든, 각 지역에 맞는 멀티미디어 영상 도서관의 형태든이요. 본원을 이전하는 비용보다 권역별로 분원을 확장하는 쪽이 오히려 비용 절감의 측면에서도 낫습니다. 항온, 항습 등 보존 센터에 필요한 환경을 새롭게 조성하는 일은 매우 까다롭고 그 비용도 만만치가 않은데요. 차라리 그 비용으로 권역별 시네마테크를 증진하고 지역 영화인과 기획자를 발굴하면 어떨까요. 여기서 복원·보존한 프로그램을 순회 상영하고 사라져가는 지역의 영화 경험과 극장 문화를 수집하는 일까지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논의는 향후 영화인들과 대화의 자리를 마련할 예정이에요.

2002 FIAF 자료

* 2002 FIAF 서울총회 자료집

전세계 국립 아카이브나 공공 시네마테크들과의 국제 교류 계획도 궁금합니다. 
FIAF(국제영상자료원연맹) 총회에서 매년 논의되는 전 세계 아카이브의 핵심 이슈들을 국내에 가져와 더욱 활발히 알리고 이를 국내 현안에 맞게 응용하는 시도를 이어나가려 합니다. 2002년에 서울에서 FIAF 총회를 최초로 유치한 적이 있는데요. (제58차 FIAF 서울총회) 앞으로 제 임기 내에 이루어지지는 않더라도 다음 총회 개최를 위한 마중물 정도는 마련하고 싶습니다. 국립영상박물관과 보존·복원 센터가 함께 완성될 때쯤 새로운 세기의 보존과 복원에 관한 비전을 한국영상자료원이 던질 수 있지 않을까요.



한국영상자료원은 공공기관으로서는 드물게 유튜브 채널 구독자 100만을 돌파하기도 했습니다. 온라인에서의 역할은 어때야 할까요.
전임 원장님께서 온라인 활성화를 성공적으로 도모하셨죠. 고전영화 유튜브가 100만을 달성한 이례적인 기록도 그 연장선이고 당연히 지속해야 할 부분이고요. 한편 저는 약간 다른 고민도 있어요. 디지털 환경이 중시되면서 전환 과정에서 오히려 소외층이 생기고 있거든요. 접근성이라는 측면에서 더 배려해야 할 부분들을 반대로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잘 연결되었으면 합니다. BFI(영국)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프랑스)는 이미 이뤄낸 것들이에요. 온라인에서 복원된 영화를 먼저 보고 극장에서는 같은 영화를 단순 상영 이상의 또 다른 체험으로 접하는 식입니다. 온라인으로는 더 많은 분들이 가깝게 영화를 느끼게 하되, 오프라인에서는 4K나 필름 경험만이 줄 수 있는 효용을 여러 관객들과 공유하는 거죠. 같은 영화지만 다른 경험을 제공하는 투 트랙이 있고 그것이 통합되는 구조가 분원 활성화에도 도움을 주리라고 봐요. 구상해보자면 BFI 플레이어의 사례처럼 플랫폼, 스트리밍 서비스 등을 개발하면 보다 안정적이고 균일화된 퀄리티의 영상을 한국영상자료원의 분원에서 접할 수 있게 되겠지요.

심도 있는 영화사의 맥락을 제시하는 프로그래밍과 보다 넓은 관객층의 소구를 자극하는 프로그램 사이의 긴장 역시 늘 존재할텐데요. 시네마테크를 비롯한 여러 기획의 청사진을 들려주신다면요.
제가 시네마테크에 있을 때도 고민이 참 컸죠. 그때는 가능한 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폭넓은 요구를 소화하려 했어요. 굉장히 깊이 들어가는 프로그램도, 보다 대중적인 프로그램도 모두 기획했고 그 균형이야말로 늘 필요한 부분입니다. 저는 이 시점에서 한국영상자료원만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좀 더 해봐야 하지 않을까 질문합니다. 단지 한국 영화니까 재발견하고 고전 영화니까 재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왜 지금 이 시점에 이 영화여야 하는가’ 맥락이 보였으면 합니다. 아카이브란 과거를 끊임없이 현재화해주는 곳이에요. 만약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할 때, 지금 우리 눈앞의 이것은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찾아주는 일을 한국영상자료원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