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한 것을 당신도 좋아할 수 있도록
시네마테크KOFA 프로그래머 오성지 인터뷰
내가 좋아한 것을 당신도 좋아할 수 있도록
시네마테크KOFA 프로그래머 오성지 인터뷰
글: 남선우(씨네21)
사진: 최성열(씨네21)

영화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꾸만 선을 긋는다. “내가 시네필은 아니지만…” 하고 운을 뗀 다음 시네필만이 할 것 같은 소리를 들려주는 건 그들의 특기다. 영화를 향한 애정, 영화에 관한 지식, 영화를 보는 빈도를 주변 영화광들과 비교하다 보면 왠지 겸손해질 수밖에 없어서 그럴 테지만, 이 사람까지 시네필이라는 호명에 손사래 치다니 놀라웠다. 셀즈닉 필름 보존학교를 졸업한 뒤 2002년부터 한국영상자료원을 지켜온 오성지 프로그램팀 차장 이야기다. 그에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시네필이 아니라면, 누가 시네필인가요?”
오성지 차장은 그의 독일인 남편을 가리켰다. 뮌헨영화박물관 관장이기도 한 그에게는 영화 외에 취미가 없다고 말이다. 한때 뜨개질을 즐겼고, 지금도 퍼즐 맞추기에 빠져있다는 자신은 아직 그 단계까지 가지 않았으니 감히 시네필이라 불릴 수 없다는 그가 덧붙였다. “어쨌든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고, 영화 자료를 수집하면서 그 뒷이야기를 듣고, 동료들과도 아침부터 오후까지 영화 얘기만 하는 건 너무 즐거워요. 입사 이래 한 번도 제 일이 싫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머리 아닌 손으로 시작한 일
그의 단순한 진심은 어려서부터 자라나고 있었다. 오성지 차장의 아버지는 긴 연출부 생활 끝에 자신의 장편 영화를 만든 감독이었고, 어머니는 잠시 아이들을 맡길 장소로 극장을 택하곤 했다. TV 앞에 모여 <주말의 명화>를 시청하고, 일본 영화 잡지를 모으고, 감독 이름 맞추기 퀴즈를 푸는 건 이 가족의 일상이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계속” 영화를 봤다. 그래도 영화는 어디까지나 애호의 영역이었다. 정말로 영화로 밥을 먹고 살 줄은 몰랐다는 게 오성지 차장의 전언이다.
“부모님이 이과에 가라고 하셨거든요. 결국 약대에 갔어요. 약사로 3년 정도 일하다가 부모님께 그랬어요. 부모님이 원하는 공부를 했지만, 재미가 없어서 더는 못 하겠다고. 지금부터는 내 마음대로 하고 싶다고.”
알아서 해보라는 부모님 말씀에 그는 미국행을 택했다. 이번에는 문과, 그중에서도 저널리즘을 배워보고 싶었다. 학부 편입 후 기사 쓰는 수업을 들었다. 그때의 영어 실력으로는 쉽지 않았다. 정치학으로 전공을 바꿔 학부를 졸업하고서야 매스 미디어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자연스럽게 박사 과정을 이어갈 줄 알았는데, 한 선배가 그에게 조언했다고 한다. “나이도 많은 네가 그렇게 공부해서는 학계에 머물기 힘들 테니 이제라도 좋아하는 공부를, 아니면 조금이라도 현실적인 공부를 해보라고.”

상처가 되었을 법도 한 충고는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해주었다. 몸과 맘이 지쳐있을 무렵, 논문 대신 BFI가 발행하는 영화 잡지 <사이트 앤 사운드>를 붙들고 있던 그의 시선이 한 페이지에 꽂혔다. 조지 이스트만 하우스의 셀즈닉 필름 보존학교 광고였다. 호기심이 생겨 학교에 방문해 보니 가슴이 뛰었다. 잔뜩 쌓여있는 필름들, 마틴 스코세이지 컬렉션… 그 사이를 누비다가 “계시”를 받았다. “이게 내가 갈 길이구나!” 30대 초반에 내린 결정이지만 두렵지 않았다. “청춘의 시기에 방황하는 것은 나의 권리”였으니까.
설렘을 따라 진학한 필름 보존학교는 “배우자마자 일할 수 있는 현장”이었다. 수업을 듣고 나면 이튿날은 학생들이 짝을 지어 이스트만 하우스의 각 부서를 돌며 작업에 임하는 시스템이었다. 오성지 차장은 당시 “천사 같은 미국인 친구” 헤더를 파트너로 만나 운이 좋았다고 돌이켰다. 레지스트리, 프로그래밍, 필름 검수, 그리고 작문까지 익힌 열 달은 “살아있는 기분”을 만끽한 기간이었다. 스틴벡에 필름을 돌려 보수하다가 느꼈다. “아, 내가 머리가 아닌 손으로 뭔가 하고 있구나.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구나.”

한국영상자료원에는 필름 보존학교 입학을 허가받고 나서 미리 눈도장을 찍어뒀다. 자료원의 국제교류 담당자를 찾아가 “내가 앞으로 필름 보존학교에 다닐 텐데, 교육 과정을 마치면 여기에 다녀야 한다”고 말했더니 내년에 입사 지원서를 넣어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2002년 서울에서 국제영상자료원연맹(FIAF) 총회가 열릴 때 필름 보존학교의 헤드 큐레이터를 따라 한국에 갔다. “오밤중에 비행기 안에서 생일을 맞으며” 국경을 갈랐다. 총회에서 한국영상자료원 직원들을 만나 자신을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떠벌리듯 드러낸” 경험은 어쩐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제가 사실 굉장히 내향적인 성격이거든요.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30대 중반에 접어드니 안정적인 직업을 구해야겠다는 의욕이 생겼으려나요. 2002년 7월에 필름 보존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영상자료원에 입사 지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고, 9월부터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 건물에서 일하기 시작했어요. 미국에서 7, 8년을 살다가 온 저를 선배들이 좀 낯설어했대요. 7부 청바지에 형형색색 양말을 신고, 선글라스까지 쓰고 돌아다녔으니까요.”
오성지 차장은 그 시절 한국영상자료원을 “약간은 동사무소 같았던” 곳으로 기억한다. 인원도 적었을뿐더러 내내 조용했으니까. 처음 맡은 업무도 경영팀에서 보고서 쓰는 일이었으니 행정에 무지했던 그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웠다. “필름 보존을 공부했으니 하루빨리 필름을 만지고 싶다”고 요청하고 나서야 보존팀으로 발령받을 수 있었다. 반나절씩 보존고에서 자료를 관리하다 보면 하루가 금방 갔다.
내가 좋아한 것을 당신도 좋아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팀을 맡은 건 이효인 전 원장이 한국영상자료원을 “영화 연구자들이 한국 영화를 공부할 수 있는 장소”로 확장하기를 희망하면서부터다. 덕분에 시네마테크 KOFA의 수많은 기획전이 오성지 차장을 거쳐 갔다. 그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프로그램은 2010년에 연 ‘임권택 전작전’. <만다라>(1981), <씨받이>(1986), <서편제>(1994)와 같은 대표작에서부터 초기작까지 자료원이 상영할 수 있는 임권택 감독의 모든 작품을 틀었다. 초대해야 할 손님도 많았고, 대담 행사도 평소보다 풍성히 꾸렸다. 규모가 큰 특별전이었던 만큼 뿌듯함도 컸다.
2011년부터 2022년까지 ‘시네마테크 KOFA가 주목한 한국영화’를 선정해 중요한 기록을 남긴 것도 보람으로 남아있다. 박찬욱, 홍상수 감독 등 그 목록에 선정된 감독은 항상 흔쾌히 관객과의 대화에 참여했다. 박찬욱 감독은 오성지 차장이 손꼽는 시네마테크 KOFA 단골 관객이기도 하다. 그는 혼자서나 가족, 동료들과 극장을 자주 찾아 조용히 영화를 보고 가는 고마운 존재라고.
오성지 차장은 국제교류 업무도 병행했는데, 그의 다채로운 해외 출장기는 자료원이 펴낸 잡지 <영화천국>의 단골 아이템이었다. 그 글들은 지금도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홈페이지에서 읽을 수 있다. 그에게 외국에서 만든 잊지 못할 추억을 묻자 곧바로 놀라운 고유명사들이 쏟아졌다.

* 2019 FIAF 어워드 수상자, 장 뤽 고다르(왼쪽)
“FIAF는 영화 문화에 기여한 분에게 ‘FIAF 상’을 수여해요. 2019년 FIAF 총회가 스위스에서 열렸는데, 그때 그 상을 장 뤽 고다르가 받았어요. 자리에 앉아 있는 제 등 뒤로 고다르 감독님이 걸어 들어오시다니! 내 두 눈으로 고다르를 볼 수 있으리라고 상상이나 해봤겠어요. 그다음으로 못 잊을 건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FIAF 총회를 주최할 때 참석자들을 베르사유 궁전에 데려가 점심을 먹인 일이에요. 그때도 고다르를 봤을 때와 비슷하게 반응했어요. 내가 태어나서 베르사유 궁전 안에서 밥을 다 먹어보는구나!”
평생에 한 번 있을 사건들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오성지 차장에게는 “자료원에서 가장 오래 한 일인 프로그램 일이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일”이라고 한다. 그는 “하나의 프로그램을 1년 전에 기획하고, 3개월 전부터 본격적으로 저작권을 클리어 해가며 상영을 준비하고, 홈페이지에 소식을 알리며 데드라인을 향해가는 일을 꽤나 즐기고 있다”고 고백했다. “마감일을 향해 업무를 딱딱 진행해 결과물이 나오는 게 재밌다”는 이유와 더불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보고 활용할 수 있게끔 해주는” 일 자체가 기쁘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날로그 세대와 디지털 세대의 중간에 낀 세대”로서 고민도 늘었다.
“이제 필름을 만져 본 영사 기사님들이 은퇴하세요. 젊은 영사 기사들은 필름을 다뤄 본 경험이 많이 없잖아요. 35mm 필름 영사기는 더 이상 새로 제작되지도 않기 때문에, 고장 나면 고쳐 써야 하는데, 그걸 해낼 수 있는 분도 적어요. 오래 일한 분들의 기술이 잘 전수돼야 옛 자료들의 수명도 길어질 텐데 말이에요. 온라인 스트리밍이 활성화되다 보니 예전처럼 영화 보는 일이 귀하지 않기도 한데, 제가 어렸을 때는 영화 보러 가는 일이 정말 귀중했거든요. 극장 체험 자체도 과거와 많이 달라졌기에 어떻게 하면 우리 시네마테크 KOFA에 관객을 더 잘 모을 수 있을지도 걱정입니다.”
금세 해결할 수 있는 과제는 아니다. 한국영상자료원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베르너 헤어조크 재단을 돕기 위해 잠시 독일에 체류 중인 오성지 차장은 헤어조크 감독의 에너지를 보며 “그의 활력이 나에게도 생기기를” 바랄 뿐이다. 헤어조크 감독은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1년에 한두 작품씩을 만들고, 영화학교 학생들과 워크숍을 진행한다고 한다. 그와 함께 한때 뉴 저먼 시네마의 기수로 불리던 알렉산더 클루게, 빔 벤더스 감독도 여전히 현역이다. 체력이 떨어지고, 호기심도 덜해지다가도 노익장들을 보면 기운을 얻을 수밖에 없다고, 오성지 차장이 끄덕였다.

* 기획전 <해진 뒤의 서울: 한국 영화에 대한 사적인 기억>(Seoul After Dark: Personal Memories of Korean Cinema)
당장 2026년 2월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의 한국영화 상영을 위해 힘내야 할 시점이기도 하다. 한국영상자료원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이기도 한 이 기획전의 제목은 <해진 뒤의 서울: 한국 영화에 대한 사적인 기억>(Seoul After Dark: Personal Memories of Korean Cinema). 오성지 차장이 뉴욕현대미술관의 영화분과 큐레이터 데이브커와 같이 프로그래밍한 이 기획전에서는 이만희 감독의 <검은머리>(1964)와 같은 고전은 물론 박찬욱 감독의 <박쥐>(2009), 황동혁 감독의 <남한산성>(2017), 봉준호 감독의 단편 <지리멸렬>(1994) 등을 선보인다.
“지금도 할 일이 많으니 2년 남짓 남은 은퇴 후에 어떻게 살아갈지 잘 떠오르지 않아요. 아까 언급한 이전 세대 독일 감독님들과 같은 활력이 내게도 생길까 궁금하기만 해요. 남편과 독일에서 살아야 할 텐데, 낭만과 현실은 다르거든요. 예전에 전혜린의 수필을 읽고 나서부터 슈바빙 거리를 걷는 게 로망이었는데, 막상 뮌헨에 와보니 사진 속 전혜린이 왜 헤어 스카프를 걸쳤는지 알겠더라고요. 겨울이 너무 추워요. 해도 없고, 온돌도 없어요.”
하지만 오성지 차장이 인정하는 시네필과 함께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가 20대의 모든 수고를 내려놓고 들어선 이스트만 하우스에서 공간 가득 쌓인 필름을 보고 설렌 듯, 한국영상자료원에 바친 세월을 마무리한 뒤에도 영화 곁에서 설렐 수 있기를, 시네마테크 KOFA의 오랜 팬으로서 기원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