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는 사람의 과몰입 결과물
한국영화박물관 전시 큐레이터 정민화 인터뷰
영화 좋아하는 사람의 과몰입 결과물
한국영화박물관 전시 큐레이터 정민화 인터뷰
글: 김성훈(씨네21)

* AI 생성이미지
최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선보이는 전시는 기획이 참신하고 용감하다. <영화문고>는 국내에서 출간한 영화 책을 한 공간에 모아 도서전을 방불케했고, <셀 위를 달려라, 길동!>은 셀 애니메이션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이용객이 직접 체험하게 해 흥미를 돋우었다. 내년 1월까지 전시하는 <디깅 사운드 트랙 - 엘피, 카세트, 시디로 듣는 한국영화의 음악들>은 간만에 영화 음악을 주제로 한 전시로, 눈과 귀를 즐겁게 하며 영화 음악에 얽힌 추억을 새록새록 떠올리게 한다. 이용자들에게 재미와 흥미뿐만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는 전시를 기획하는 사람은 정민화 큐레이터다. 그를 만나 한해를 마무리하는 소회부터 물었다.
올해 전시를 되돌아보면 어땠나.
아카이빙 기관으로서 해야 하는 전시와 보여주고 싶은 전시를 조화롭게 진행했던 것 같다. <셀 위를 달려라, 길동!>은 한국영상자료원이 한국 애니메이션을 수집, 보존하는 상황에서 상영 쪽으로만 활용해 오다가 전시로도 확장해 선보였던 점에서 의미가 있는 전시다. <영화문고>나 <디깅 사운드트랙 - 엘피, 카세트, 시디로 듣는 한국영화의 음악들>(이하 <디깅 사운드트랙>)은 영상자료원이 시도하고 싶은 전시고.

이중에서 유독 애착이 갔던 전시는 무엇인가.
다 뿌듯한 전시지만 지금 진행하고 있는 <디깅 사운드트랙>이랑 올해 초에 진행했던 <영화문고>는 개인적으로 특히 좋았다. 그 이유는, 어렸을 때 여러 꿈을 꾸지 않나. 잠깐 서점을 운영하고 싶었던 적도 있고, 음악을 좋아해서 레코드 가게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두 전시는 관람객이 직접 책을 읽고 음반을 듣는 방식이라 전시 자료를 잘 보존하고 운영해야 해서 전시장에 상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관람객을 직접 안내하는 과정에서 어렸을 때 꿈을 잠깐이나마 이룬 기분이 들었다.
한국 출판 시장에서 영화 책은 마이너한 장르인데도 한 자리에 모아두니 이렇게 많았나 싶더라. 영화 책을 한데 모아 전시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무엇인가.
대학원 시절 영화 이론을 전공한 까닭에 그때 읽었던 영화 책들을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책장에 꽂힌 책들을 보면서 영화 책도 트렌드를 타는 게 느껴졌다. 영화 이론을 처음 공부했을 때만 해도 이론서가 많았는데 지금은 영화 에세이나 특정 팬덤을 겨냥해 영화를 분석하는 책이 많이 나오고 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출간한 영화 책을 모으면 영화 산업의 흐름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영상자료원 이용자들 대부분 영화를 좋아하시니 과거에는 어떤 영화 책이 나왔는지 궁금해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많은 책을 어떻게 보여줄지 고민을 많이 하셨을 것 같다.
전시의 메인이 됐던 책은 99권인데, 이것은 제가 영화 공부하기 전부터 나왔던 책부터 제가 공부하면서 읽었던 책, 그리고 이론 공부를 끝내고 난 뒤에 나왔던 책을 출간 순으로 보여주는 히스토리 섹션이다. 이 책들을 중심으로 실제로 판매하거나 직접 읽을 수 있는 책들을 분류하니 총 300~400종 정도 됐었다. 처음에는 인물 등 카테고리 별로 분류하다가, 전시 소식을 뒤늦게 들은 출판사들이 연락해 와 추가되면서 분류도, 전시 위치도 조금씩 바뀌었다. 이용객이 없는 시간대 저도 책을 읽어봤는데, 괜히 이 전시를 만들고 싶었던 이유를 다시 확인하는 기분이 들어서 좋더라.
전시하고 싶었는데 여러 이유로 전시하지 못한 책도 있나.
그런 책은 없었고, 주변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전시한 책 중에서 제 책도, 함께 전시를 준비했던 분들의 책도 있었다. 제 책의 경우 논문을 쓸 때 읽었던 책이어서 책갈피 인덱스가 되게 많이 붙었는데, 처음에는 그대로 전시하다가 나중에 떼어냈다. 감독, 배우, 작가, 평론가께 추천 책 5권과 이유를 청탁해 전시 공간에 따로 레이아웃을 만들어 보여주었다. 박정민 배우님은 메일을 보내자마자 참여하겠다고 회신을 주어서 감사했다. 박찬욱 감독님께서도 <어쩔수가없다>를 촬영하는 도중에 레이아웃에 딱 맞는 글량으로 핵심만 보내주셔서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셀 위를 달려라, 길동!>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주요 캐릭터를 통해 셀 애니메이션을 보여준 전시인데. 전시 공간 한가운데에 원형 유리를 통해 셀을 해석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영화문고>(책)나 <디깅 사운드트랙>(음악)은 평소 좋아하는 분야라 레퍼런스나 지식이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어서 마음이 편했는데, 셀 애니메이션은 정확히 어떤 프로세서로 작업하는지 잘 몰라서 전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이 있었다. 공부부터 했다. 춘천 애니메이션 박물관도 찾고, 해외에서 출간한 책도 읽고, 유튜브를 보면서 셀 애니메이션을 하나씩 알아갔다. 공부해보니 정말 흥미롭더라. 업계 분들도 만났었는데, 지금은 디지털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지만, 모든 애니메이터들이 셀 애니메이션에 대한 존경심이 여전히 크더라. 그걸 보면서 셀 애니메이션 자체를 다루는 것도 재미있겠다 싶었다. 예산, 공간 등 현실적인 제약이 있어서 대중에게 친숙한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셀 애니메이션에 집중하기로 했다.
전시 이름이 되게 직관적이고, 쉬운 게 인상적이었다. 전시 이름을 지을 때 어떤 고민을 했나.
전시 이름을 정하는데 시간을 많이 들인다. 사람들이 전시를 가장 먼저 인식하는 게 이름이니까. 국내외 관련 책을 많이 찾아보고, 구글에서 유사한 제목이 없는지 검색하고, 주변에 의견을 많이 구한다. 여러 제목 후보가 많았다.
둘리, 독고탁 등 캐릭터가 많은데, 그 중에서 길동을 제목으로 활용한 건 이유는 뭔가.
전시에도 소개했듯이 한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이 <홍길동>(1967)이다. 전시한 애니메이션 중에서 가장 최근작이 <아기 공룡 둘리-얼음별 대모험>(1996)인데 고’길동’ 캐릭터가 있지 않나. 길동에서 시작해 길동으로 끝난다는 의미로 활용했다.
‘도전 나도 에니메이터!’ 같은 어린이나 어른 관람객이 체험할 수 있는 기획도 돋보였는데. 요즘 어린이들은 챗지피티로 지브리 스타일의 애니메이션 이미지를 직접 만들어낼 줄 아는 시대가 아닌가.
애니메이터들이 셀 애니메이션에 대한 존경이 있듯이 셀 애니메이션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려주는 것이 이 전시의 주요 목적이었다. 이용객이 제작 원리를 직접 체험하면 좋아할 것 같았다.

지금 전시하고 있는 <디깅 사운드트랙>은 영화음악을 주제로 한 전시인데. 보통 전시가 눈이 즐겁다면, 이 전시는 귀가 즐거운 전시고, 주옥 같은 영화 음악들을 한자리에 모으니까 그것대로 그 음악에 얽힌 추억들이 생각나더라.
지난 2017년 <한국 영화와 대중가요, 그 100년의 만남>이라는 전시를 한 적 있는데 그때는 한국 영화 속 대중가요의 역사를 쭉 보여줬었다. 영화 음악과 관련한 전시를 다시 한다면 이용객이 음악을 직접 들을 수 있는 형식으로 구성하고 싶었다. <영화문고>를 기획할 때도 책을 진짜 읽어보게 해야지, 책 표지만 보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듯이 영화 음악 전시를 왔다면 음악을 들어보게 하는 게 중요했다. 그것도 턴테이블이나 카세트 테이프, CD 플레이어 등 어렸을 때 음악을 들었던 기기로 듣게 하는 게 목적이었다. 그 기기로 음악을 들었던 세대는 향수를 느낄 수 있을 것이고, 사용한 적 없는 젊은 세대는 지금의 스트리밍과 비교했을 때 음질이 어떤지 경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지금과 같은 형식으로 구성했다.
전시하고 싶었는데 여러 이유 때문에 전시하지 못한 영화 음악이 있나.
인생 영화 음악은 아니지만, 폴 토머스 앤더슨이 연출했던 다큐멘터리 <주눈> OST의 LP를 꼭 전시하고 싶었는데 외국 아마존을 찾아봐도 없어서 구할 수가 없어 아쉬웠다. 라디오헤드의 조니 그린우드가 음악을 작업했는데,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을 너무 좋아해서 전시하고 싶었다.

지난 전시 <씬의 설계>는 올해 여러 도시에서 투어 전시를 진행하고 있다. 영상자료원으로선 히트 전시 IP를 가지게 된 셈인데. 여러 도시에서 전시했을 때 관람객 반응이 어떤가.
올해 <씬의 설계>는 방콕, 시드니, 마닐라에서 전시했다. 한국문화원이 이 전시를 진행하면 영화 상영과 토크 프로그램을 함께 구성하는데, 류성희 미술감독님께서 방콕과 시드니를 직접 방문하셨다. 류 미술감독님께서 방콕은 20대 젊은 관객이 되게 많았고,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고 말씀 주셨다. 시드니는 뉴사우스웨일스(NSW)라는 유명한 미술관에서 진행했었는데, 나이 드신 분들이 많았다고 하더라. 전시 지역마다 관람객 연령대도, 전시나 토크 분위기도, 반응도 조금씩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한국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이 많이 찾는 게 공통점인 것 같다.
보통 영화 미술은 완성된 공간으로 보여주기 위한 목적인 업무인데, 영화 속 공간을 전시한다는 기획은 어떤 계기로 하게 됐나.
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결과물(공간)을 보는 건데, 그 결과물을 구현하는 과정이 어떤 작업을 거치는지 궁금했었다. 공간을 구현하기 전에 리서치부터 시작하니까 어떤 작품, 사진, 회화에 영감을 받았는지, 로케이션 헌팅 때는 어떻게 준비하는지 그 과정을 전시하면 사람들이 영화를 볼 때 좀 더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내년에는 어느 도시에서 선보일 계획인가.
캐나다 오타와와 멕시코의 멕시코시티에서 진행할 계획이다.

전시 기획이 늘 참신하고 새롭다. 기획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민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가장 많이 고민한다. 회의도 정말 많이 하고, 전시 공간이 한정되어 있어서 이전에 했던 전시와 구성이 비슷하게 나올까봐 공간 구성을 여러 번 뒤집는다.
예산이 더 많이 확보되면 시도하고 싶은 전시가 있나.
예산보다는 공간이 지금보다 더 커지면 더 많은 시도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는 암전이 되면서 서서히 영화의 세계로 몰입하지만, 전시는 반대로 전시실에 들어서는 순간 공간감을 느끼며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경험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공간이 주는 체감이 매우 중요한데, 현재 전시실은 좁아서 공간 구성을 하는 데 제약이 많다.
내년 전시 계획에 대해서도 간단히 알려줄 수 있나.
일단은 애니메이션 예산이 책정돼서 올해와 또 다른 시도를 해야겠다고 고민하고 있다. 나머지 하나는 건축과 시나리오, 두 가지 주제 중에서 고민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