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상자료원 1974
온라인 전시로 만나는 "한국영상자료원 50년의 기록"
한국영상자료원 1974
온라인 전시로 만나는 ‘한국영상자료원 50년의 기록’
온라인 전시로 만나는 ‘한국영상자료원 50년의 기록’
글: 이지윤(한국영상자료원)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당신에게 ‘한국영상자료원(이하 영자원)’은 어떤 곳인가. 적어도 홈페이지에 접속해 이 글을 읽을 만큼 이곳에 관심을 기울이는 독자라면, 영자원이 각자에게 주는 의미가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잠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2000년대 초반 무렵의 내게 영자원은 어쩌다 가끔 들러 구해 보기 힘든 옛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어릴 적 TV에서 우연히 봤던 강렬한 인상의 ‘그 영화’가 무엇이었는지 몹시 궁금했던 2000년대 중반쯤, 그것이 <깊은밤 갑자기>라는 걸 비로소 알게 된 것은 KMDb VOD 기획전을 통해서였다. 2000년대 후반 무렵, 영화를 전공하며 한국영화사에 대한 논문을 쓰겠다고 처음 결심했던 것도 당시 영자원이 발간한 고전영화 DVD 컬렉션들 덕분이었다.
어느덧 이곳의 직원으로 십여 년째 근무하고 있는 지금, 창립 50주년을 맞아 회사의 역사를 정리해야 하는 만만치 않은 작업을 앞에 두고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나의 경험을 우회해 마주한, 이처럼 다분히 주관적인 기억이다. 어쩌면 그도 당연한 것이, 역사에 대한 호기심이란 개인의 작은 경험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일 수 있다. 사소한 기억에서 출발하다 보면 점점 사적인 기억이 닿지 않는 역사의 조각이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사적인 기억은 얼추 되짚어 봤으니 이제 ‘한국영상자료원 50년의 기록’의 조각들을 본격적으로 들춰볼 시간이다.
9월 1일부터 구글 아트 앤 컬처(Google Arts & Culture)를 통해 공개하는 ‘한국영상자료원 50년의 기록’ 온라인 전시는 창립부터 현재까지 영자원이 영상문화 보존을 위해 펼친 주요 활동들을 사진과 영상, 문헌 등 다양한 콘텐츠로 소개한다. 특히 이번 온라인 전시는 영자원이 서울 중구 내자동과 남산동(1974~1990년), 서초동 예술의 전당(1990~2007년), 상암동(2007년~현재)으로 청사를 이전한 시기를 중심으로, 세 가지 이야기로 펼쳐진다. 청사 이전은 영자원의 비전과 활동상에 주요한 변곡점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시기별 영자원의 활동은 온라인 전시에서 찬찬히 다뤄지고 있으니, 여기서는 전시 자료 중 일부를 주관적 감상을 버무려 소개하려 한다.
전용면적 48평(159㎡) 필름 보관실에서 첨단 보존·복원 시설을 갖춘 파주보존센터로

* 목재 필름 보관실 (남산동 청사, 1979~1990)
1974년 1월 18일, ‘한국필름보관소’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영자원은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 이하 영진공)의 내자동 사옥(서울 중구) 안에서 첫 살림을 꾸렸다. 1976년, 영진공이 남산동으로 사옥을 이전할 때 영자원도 함께 그곳으로 이사했는데, 이때 비로소 ‘보존고’라 할만한 필름 보관실을 꾸릴 수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튼튼한 철재 프레임에 자유자재로 펼쳤다 접었다 할 수 있는 모빌랙을 기대하는 것은 지나치게 성급하다. 당시 보관실에 설치된 필름 적재 선반은 목재로 만들어졌고,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진 정도였다. 두 개의 보관실이 구비되었다고는 하지만, 두 개를 합친 전용면적은 고작 48평(159㎡)이었다. 보관실 한편에는 작은 책상을 놓고, 거기서 간단한 필름 점검과 보수 정도를 진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필름 보존고 설비의 기본값으로 이야기되는 ‘항온항습 시설’은 꿈도 못 꿨던 시절이었다.
1990년 9월, 예술의 전당 예술자료관 건물에 새로운 둥지를 튼 영자원은 비로소 항온항습 설비를 겸비한 보존고를 갖추게 되었다. 보존고 전용면적만도 535평(1,768㎡)이 되었고, 필름 보존고 외에도 음향, 포스터, 스틸, 비디오 등의 비필름 보존고까지 구비했다. 2007년, 상암동 청사로 이전하면서 보존고는 더욱 확대되고 전문화되어, 자료 유형별로 최적화된 보존 환경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2016년에는 경기도 파주에 제2보존센터(이하 ‘파주보존센터’)를 건립해, 상암-파주 간 이원 보존 체계를 통해 영상 유산을 더욱 안전하게 보존하는 길을 마련했다. 온라인 전시에서는 구글 스트리트 뷰를 연계해 파주보존센터 내부를 가상으로 체험해 볼 수 있는데, 1979년 남산동 시절에 처음 마련된 필름 보관실과 비교해 본다면, 파주보존센터를 건립할 당시 영자원 직원들이 느꼈을 감정이 어떠했을지 상상하게 된다.
▶ 파주보존센터 가상체험(구글 스트리트뷰) https://g.co/arts/Tj6rYp5FPWWWwGMQ6
국가등록문화유산 필름이 안치된 특별 보존실
여기에 더해, 온라인 전시에서는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영화 필름이 별도 안치된 보존실 내부도 살펴볼 수 있다. 이곳에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안종화, 1934)와 가장 오래된 발성영화 <미몽>(양주남, 1936)의 35mm RP, <자유만세>(최인규, 1946)와 <마음의 고향>(윤용규, 1949), <검사와 여선생>(윤대룡, 1958)의 35mm DN, <피아골>(이강천, 1955)과 <자유부인>(한형모, 1956), <시집가는 날>(이병일, 1956)의 35mm ON 등 총 8편의 필름이 보존되어 있다. 오래전부터 보존고 중에 이런 곳도 있다는 말을 누누이 들어왔던 차에, 이번 온라인 전시를 위해 이곳을 방문할 때 솔직히 남몰래 설레기도 했다. 국가등록문화유산이 별치된 보존실에는 혹시 금박이라도 박혀 있지는 않을까?

* 국가등록문화유산 보존고 (파주보존센터)
잔뜩 기대하며 보존실 안으로 들어선 순간, “거기가 여기예요?”라는 질문이 제일 먼저 나왔다. 외관상 여느 보존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공간으로, 나의 상상과는 매우 다른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을 둘러보다 이내 생각이 달라졌다. 무엇보다 ‘영자원에 보존된 모든 필름이 유산이지 않던가?’라는 생각이 들었고, 곧이어 빈자리가 훨씬 많은 이 모빌랙을 ‘앞으로 더 많은 등록문화유산 필름들로 차곡차곡 채워나가야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영화와 시네필의 연결고리
보존고의 변천사를 훑어봤으니, 이제 영화관으로 눈을 돌려보자. 1990년 서초동 예술의 전당으로 이전할 당시만도 영자원은 ‘한국필름보관소’라 불렸다. 이듬해인 1991년 9월 1일, 한국필름보관소는 비로소 지금의 명칭인 ‘한국영상자료원’으로 변경되었다(이 온라인 전시가 하필 ‘9월 1일’에 오픈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명칭이란 기관의 역할과 비전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해서, 필름/보관소에서 영상/자료원으로의 변경은 수집·보존의 범위가 ‘필름’에서 ‘영상’으로, 역할과 활동의 범위가 ‘보존’에서 ‘열람·활용’으로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서초동 청사 시절부터 영화관과 자료실을 운영하고, 사진전 등의 전시를 개최했던 것도 다 그런 연유에서다.

* (좌측부터) 서초동 청사 ‘고전영화관’ 입구/ 서초동 청사 입주 개관 기념 영화상영회 (1990.11.)
아직은 ‘시네마테크’라는 개념과 용어가 생소했던 시절, 서초동 청사의 영화관은 ‘고전영화관’으로 불렸다. 110석, 70석 규모의 상영관이었다고 하니, 꽤 작고 아담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좋은 영화 보기’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여러 고전영화가 소개되었고, ‘토론이 있는 영화감상회’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영화평론가, 영화감독이 관객과 만나 대화하는 장이 펼쳐졌다. 지금의 시네마테크KOFA처럼, 저 때 저곳 역시 영화와 시네필을 연결하고 함께 교감하는 공간이었다. 예술의 전당 입주 개관 기념 영화상영회에 모인 관객들의 면면에 피어난 웃음이 이 공간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사진을 보는 이에게도 웃음이 번지게 하는 걸 보면, 묘한 마력의 사진임이 분명하다.
낡은 자료가 풍기는 아우라 속으로
테크니션이 아니어서 보존 필름을 직접 만져볼 기회는 전무하지만, 오래된 사진이나 문헌을 실물로 접할 기회는 종종 있다. 자칫 잘못했다간 바스러질 것 같은 낡은 자료를 조심스럽게 만질 때면, 발터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가 진정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힘들 때도 있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는 동안에도 아우라의 순간을 몇 번 경험할 때가 있었는데, <이국정원> 시나리오를 꺼내봤을 때가 바로 그런 순간 중 하나였다.
<이국정원>(전창근ㆍ도광계ㆍ와카스기 미쓰오, 1957)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한국ㆍ홍콩 합작 영화로, 한국인 청년 작곡가와 홍콩 여가수 사이의 사랑을 그린 멜로드라마다. 이 작품은 영자원의 역사에서도 남다른 의미가 있는데, 영화의 필름을 찾기 위해 몇 년을 발품 팔아가며 노력한 끝에 2013년, 영자원은 홍콩 쇼 브라더스의 자료 보관고에서 드디어 <이국정원> 필름을 발견했다. 초산화증후군과 수축, 탈색, 변색 등으로 훼손이 심한 필름이었지만, 일본 이마지카 현상소와 협력해 최선의 복원을 마쳤다. 하지만 문제는 사운드였다. 영화의 사운드 필름은 유실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쉽게 포기한다면 영자원이 아니다. 영자원은 ‘라이브 더빙 쇼’라는 공연과 함께 영화를 상영했다. 영화가 제작되던 당시 큰 인기를 누렸던 라디오 드라마 형식에 착안해, 성우들이 무대 위에서 직접 등장인물의 대사를 낭독했고 현장에서 각종 효과음을 만들어냈다. 이는 영화 필름 자체에 대한 복원을 넘어 당대의 사회문화사를 복원한 것으로, 2008년 <청춘의 십자로> 변사 공연에 이은 두 번째 시도였다. 이 같은 복원에 참고가 된 것은 영화의 시나리오들이었다. 영자원은 남아 있는 <이국정원> 한국어 시나리오와 홍콩 쇼 브라더스에서 함께 수집한 중국어 대본을 참조해 등장인물의 대사를 채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 홍콩 쇼 브라더스에서 수집한 <이국정원> 중국어 대본
흰 바탕에 ‘이국정원’의 한자가 붉은색으로 적혀있는 표지를 넘기면, 얇은 종이 위에 파란색 잉크로 타이핑된 등장인물들의 중국어 대사들이 펼쳐진다. 중국어를 모르는 내게 이 글자들은 의미 있는 기호가 되지는 못하지만, 책 자체로 깊은 전율을 전달한다. 아마도 반세기도 훨씬 전에 인쇄된 낡은 책이자 당대 사회문화사 복원을 위한 사료에서 오는 아우라일 것이다. 온라인 전시인 탓에 이 경험을 오롯이 전달할 수 없는 게 내심 아쉽지만, 가상으로나마 조금은 느껴지기를 바랄 뿐이다.
* 9월 1일 전에 이 글을 접하는 독자들에게는 죄송하지만, ‘한국영상자료원 50년의 기록’ 온라인 전시는 구글 아트 앤 컬처 플랫폼을 통해 9월 1일부터 공개된다. 하지만 공개를 기다리는 동안, 다른 전시를 둘러보는 것은 어떨까? 한국영상자료원 구글 아트 앤 컬처 페이지에서는 이 외에도 한국영화에 대한 다양한 온라인 전시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