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영화자료총서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29
일제강점기 조선의 주요 일간지에 실린 영화 및 연예 기사와 광고들을 연대순으로 모아 정리하는 ‘일제강점기 영화자료총서: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제10권. 1929년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일보, 중외일보의 관련 기사 총망라.
1929년, 조선영화 제작에 빨간 불
1929에는 신흥영화공장(함흥), 프로키네마(만주), 조선활동사진제작소(광주) 등 각지에서 영화제작사가 설립되어 영화 촬영 소식을 알렸다. 5월에는 안정적인 제작환경 구축을 도모하며 동양영화제작주식회사가 세워져 주식을 발행하고 촬영소까지 건설하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9년에 공개된 신작은 <벙어리 삼룡이>(나운규) 등 5편에 불과했고, 이 중 1929년에 제작된 작품은 <종소래(종소리)>(김상진)뿐이었다. 그나마 4월 이후로는 단 한편의 신작도 개봉되지 못한다. 작품을 내지 못하고 사라진 제작사도 적지 않았고, 조선영화 최고의 흥행사 나운규프로덕션도 분열된다. 이 사이 영화인들은 조선영화의 방향성을 고민하며 작품 대신 담론 생산에 힘을 쏟을 수밖에 없었는데, 임화·김유영 등 카프계열 영화인을 중심으로 12월에 결성된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의 담론 투쟁은 특별한 주목을 요한다. 이들의 주장과 더불어 제작에 관계된 1929년의 기사들을 따라가다 보면, 당시 조선영화계가 마주한 복잡한 문제들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혼란한 흥행계
조선영화 제작 침체와 토키로의 전환 문제는 흥행계에도 타격을 주었다. 관객 동원에 사활을 건 극장들은 대작 외화 유치 경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고, 과도한 경쟁은 필름 대여료를 폭등시켜 결국 경영난으로까지 이어졌다. 특히 <왕중왕>(The King of Kings, 세실 B. 드밀, 1927), <거리의 천사>(Street Angel, 프랭크 보제이즈, 1928)를 둘러싼 단성사와 조선극장 간의 기 싸움은 배급사와의 이중계약 문제로까지 확대되어 화제를 낳았다. 심지어 조선극장의 경우에는 경영자간 소송 분쟁, 소유주의 폐쇄 명령 등 악재를 맞는다. 경성 흥행계뿐만 아니라 대구를 비롯한 지역 흥행계도 극장 내 반목, 유치 경쟁, 화재, 폐관 등 부침을 거듭하는바, 1929년 기사들은 당대 흥행계의 상황이 얼마나 혼란스러웠으며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노력들 또한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를, 때로는 냉소적으로 때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하고 있다.
전시되는 식민지, 과시하는 제국
1929년 9월부터 10월까지 조선박람회가 개최되었다. 이에 1월 초부터 신문지상에는 막대한 예산부터 준비 상황, 회장의 규모 및 구성까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조선박람회 관련 기사가 다수 게재된다. 특히 조선총독부는 영화를 가장 효율적인 선전수단으로 간주, 총독부 직영으로 한 번에 300명 이상이 관람할 수 있는 영화 상설관을 설치하여 하루 4회 선전영화를 상영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각종 관공서와 상공회사에서는 각 도(道)에 촬영반을 보내 지역의 풍경과 산업을 소개하는 영상 제작에 박차를 가하는데, 경무국에서는 국경 경비 상황을 촬영하기 위해 경관 수백 명을 동원하기도 했다. 이는 조선영화 제작이 여의치 않던 상황과 대조를 이루며 제국과 식민지의 관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할 수 있다.
1929년, 조선영화 제작에 빨간 불
1929에는 신흥영화공장(함흥), 프로키네마(만주), 조선활동사진제작소(광주) 등 각지에서 영화제작사가 설립되어 영화 촬영 소식을 알렸다. 5월에는 안정적인 제작환경 구축을 도모하며 동양영화제작주식회사가 세워져 주식을 발행하고 촬영소까지 건설하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9년에 공개된 신작은 <벙어리 삼룡이>(나운규) 등 5편에 불과했고, 이 중 1929년에 제작된 작품은 <종소래(종소리)>(김상진)뿐이었다. 그나마 4월 이후로는 단 한편의 신작도 개봉되지 못한다. 작품을 내지 못하고 사라진 제작사도 적지 않았고, 조선영화 최고의 흥행사 나운규프로덕션도 분열된다. 이 사이 영화인들은 조선영화의 방향성을 고민하며 작품 대신 담론 생산에 힘을 쏟을 수밖에 없었는데, 임화·김유영 등 카프계열 영화인을 중심으로 12월에 결성된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의 담론 투쟁은 특별한 주목을 요한다. 이들의 주장과 더불어 제작에 관계된 1929년의 기사들을 따라가다 보면, 당시 조선영화계가 마주한 복잡한 문제들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혼란한 흥행계
조선영화 제작 침체와 토키로의 전환 문제는 흥행계에도 타격을 주었다. 관객 동원에 사활을 건 극장들은 대작 외화 유치 경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고, 과도한 경쟁은 필름 대여료를 폭등시켜 결국 경영난으로까지 이어졌다. 특히 <왕중왕>(The King of Kings, 세실 B. 드밀, 1927), <거리의 천사>(Street Angel, 프랭크 보제이즈, 1928)를 둘러싼 단성사와 조선극장 간의 기 싸움은 배급사와의 이중계약 문제로까지 확대되어 화제를 낳았다. 심지어 조선극장의 경우에는 경영자간 소송 분쟁, 소유주의 폐쇄 명령 등 악재를 맞는다. 경성 흥행계뿐만 아니라 대구를 비롯한 지역 흥행계도 극장 내 반목, 유치 경쟁, 화재, 폐관 등 부침을 거듭하는바, 1929년 기사들은 당대 흥행계의 상황이 얼마나 혼란스러웠으며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노력들 또한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를, 때로는 냉소적으로 때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하고 있다.
전시되는 식민지, 과시하는 제국
1929년 9월부터 10월까지 조선박람회가 개최되었다. 이에 1월 초부터 신문지상에는 막대한 예산부터 준비 상황, 회장의 규모 및 구성까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조선박람회 관련 기사가 다수 게재된다. 특히 조선총독부는 영화를 가장 효율적인 선전수단으로 간주, 총독부 직영으로 한 번에 300명 이상이 관람할 수 있는 영화 상설관을 설치하여 하루 4회 선전영화를 상영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각종 관공서와 상공회사에서는 각 도(道)에 촬영반을 보내 지역의 풍경과 산업을 소개하는 영상 제작에 박차를 가하는데, 경무국에서는 국경 경비 상황을 촬영하기 위해 경관 수백 명을 동원하기도 했다. 이는 조선영화 제작이 여의치 않던 상황과 대조를 이루며 제국과 식민지의 관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할 수 있다.
연구기획 및 진행: 이유미(한국영상자료원)
공동연구원: 최은숙, 조외숙, 이광욱
공동연구원: 최은숙, 조외숙, 이광욱
발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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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신문기사 본문(해제 포함)
목록(기사, 극장, 영화사 및 단체, 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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