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아파 일상을 포기해야 했던 권(權)(서영화)이라는 어학원 강사가 있다. 산에 들어가 요양을 한 후 몸이 회복되어 서울로 돌아오게 된 날, 그녀는 전에 일하던 어학원에 들린다. 거기에 그녀에게 보내진 두툼한 편지 봉투 하나가 맡겨져 있었다. 이년 전 모리(카세 료)라는 일본인 강사가 어느 날 그녀에게 결혼 신청을 한 적이 있다. 권은 생각할 말미를 달라고 했고, 그 다음날 거절했다. 모리는 그 직후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그가 한국에 다시 돌아와 그녀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모리의 편지를 어학원 로비에서 한 장 읽었고, 읽고 난 후 갑자기 신선한 공기가 필요해졌다. 어학원 계단을 내려오다가 머리가 핑 돌아 쓰러졌고, 그때 손에 들고 있던 편지들이 계단 밑으로 떨어졌다. 흩어진 편지들을 거두어들이면서 권은 편지들에 날짜가 없음을 깨달았다. 이제 그녀는 편지들이 쓰인 순서를 정확히 알 도리가 없게 됐다.
"-주인공인 여행자 모리를 연기한 가세 료 배우가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이처럼 한 배우가 영화를 지배하는 경우는 <해변의 여인>의 문숙(고현정) 이후 처음이라고까지 느낍니다. 가세 료가 <자유의 언덕>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 그리고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준 영감을 되도록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2012년인지 2013년인지 일본에 갔을 때 잡지 인터뷰를 했는데 가세 료씨가 인터뷰어로 나왔습니다. 인터뷰 초입에 그 사람이 왜 제 영화를 좋아하는지 길게 얘기를 했는데, 그때 그 사람 뺨 전체가 빨개졌습니다. 그렇게 오래 얼굴이 빨개져 있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수줍어서 그런 거 같습니다. 같은 남자가 봐도 이렇게 고울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는 얘기도 참 좋았습니다. 괜히 하는 소리나, 주워들은 소리나, 척하는 소리가 하나도 없는 거 같았습니다. 보통 때 일상에서 많이많이 느끼고 사는 사람 같았습니다. 영어로 하니깐 서로 한계가 있었지만, 자기가 느낀 걸 정확히 표현하려고 굉장히 애를 썼습니다. 기억이 확실하진 않지만, 내 영화를 보고 “해변을 산책하다 우연히 발견한 조약돌” 같다고 했습니다. 서로에게 집중하느라 인터뷰 자체는 어설프게 끝났던 거 같습니다. 나가서 복도에서 담배를 피웠습니다. 담배를 피우다 내가 언젠가 같이 영화 한편 하겠냐고 물었고, 바로 그러겠다고 대답했습니다. 태권도나 가라테 같은 거 혹시 해봤냐고 물었고, 못한다고 수줍게 대답했습니다. 그날 받은 인상으로 영화 끝까지 간 겁니다. 그 후 그가 한국에 오고, 촬영하고 하면서 다른 수많은 인상들이 있었겠지만, 전 그 처음 인상에 제일 집중했던 거 같습니다." (김혜리, '시간이란 틀의 압력이 약해지면 뭔가 달라질까? : 홍상수 감독 서면 인터뷰', 씨네21, 2014.09.16)